경력이 쌓일수록 이력서는 왜 길어질까
신입 때는 한 페이지였던 이력서가 5년 차가 되면 두세 페이지가 된다. 10년 차가 되면 그동안 했던 일을 빠짐없이 적어 넣는다. 시장조사, 사업계획서 작성, 일정 관리, 유관부서 커뮤니케이션, 월간 보고서, 신규 거래처 발굴, 고객 문의 대응. 틀린 문장은 하나도 없다. 실제로 다 했던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이 일한 사람처럼은 보이는데 정작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 일'을 많이 쓸수록 핵심 경력이 묻힌다
이력서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다. 하나는 업무(task), 무엇을 했는가. 다른 하나는 성과(impact),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SNS 콘텐츠 기획 및 운영"은 업무다. "콘텐츠 포맷 개편 → 6개월간 팔로워 1.2만에서 3.1만"은 성과다. "월간 매출 보고서 작성"은 업무다. "매출 데이터 자동화 → 보고서 작성 시간 월 20시간에서 5시간"은 성과다. 채용 담당자가 궁금한 건 지원자가 얼마나 바빴는지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하나 더 있다. 10개의 경력 중 지금 지원하는 자리에서 정말 중요한 경험이 3개라고 해보자. 나머지 7개까지 비슷한 비중으로 적어버리면, 3개가 두드러지는 게 아니라 7개 속에 섞여 사라진다. 이력서에서 정보량과 설득력은 비례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얼마나 많이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먼저 보이게 하느냐다.
JD가 문제지라면, 이력서는 답안지다
채용공고(JD)는 회사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려주는 문제지다. 이력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안지여야 한다. 수학 시험에서 자신이 아는 국어, 영어, 역사 지식까지 전부 적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력서 앞에서는 다들 그렇게 한다. 내가 해본 일이니까, 아까우니까, 일단 다 적어 넣는다.
JD가 B2B 마케팅, 리드 확보, 데이터 분석, 캠페인 성과관리를 원한다면 그 네 가지를 증명하는 경험이 앞에 나와야 한다. 행사 운영이나 정산, 사내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굳이 같은 무게로 넣을 이유는 없다.
좋은 이력서는 내 경력 전체를 보여주는 문서가 아니다. 상대가 묻는 것에 가장 강한 증거를 골라 보여주는 문서다. 그래서 이력서를 잘 쓴다는 건 경력을 요약하는 능력이라기보다, 경력을 편집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 답안지의 점수는 얼마나 많이 썼느냐가 아니라, 묻는 것에 얼마나 정확히 답했느냐로 결정된다.
모든 업무를 숫자로 바꿀 수는 없다
다만 모든 일이 깔끔한 성과 지표로 정리되는 건 아니다. 그런 경우까지 억지로 숫자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이럴 때는 '업무 → 범위 → 기여'로 한 단계만 더 들어가면 된다.
"채용 업무 담당"보다는 "연간 50여 명 규모 경력직 채용 전 과정 운영"이 낫고, 가능하다면 "→ 평균 채용 기간 45일에서 32일 단축"까지 가면 더 좋다.
업무를 지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업무를 가치가 보이는 문장으로 바꾸라는 이야기다.
"그래서?"라는 질문
이력서를 다 쓴 뒤에 스스로 적용해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각 문장 뒤에 "그래서?"를 붙여보는 것이다.
"신규 거래처를 관리했습니다." → 그래서? "월간 실적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 그래서? "프로젝트 일정을 관리했습니다." → 그래서?
물음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문장은 아직 내가 한 일에서 끝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콘텐츠 포맷 개편 → 평균 조회수 180% 증가"에는 "그래서?"가 필요 없다. 이미 결과까지 말했기 때문이다.
답이 반드시 매출이나 숫자일 필요는 없다. 시간을 줄였거나, 오류를 줄였거나, 프로세스를 바꿨거나, 다른 사람의 의사결정을 도왔거나, 누군가의 일을 더 쉽게 만들었다면 그것도 결과다.
그리고 이 질문은 경력이 길수록 더 중요해진다. 경력 15년 차에게 회사가 궁금한 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했나"가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무엇을 얻었나"다. 스무 개의 평범한 업무보다, 다섯 개의 선명한 경험이 더 무겁다.
경력이 쌓일수록 이력서에 더 많은 것을 넣고 싶어진다. 하지만 좋은 경력직 이력서는 반대로 간다. 신입의 이력서는 채우는 싸움이지만, 경력직의 이력서는 버리는 싸움이다.
오늘의 MBA
JD가 문제지라면, 이력서는 답안지다. 답안지에는 아는 것을 전부 쓰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에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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