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군에 들어야 시작되는 게임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떠올려 보자. 상사는 전 직원의 역량 평가표를 펼쳐 놓고 가장 뛰어난 사람을 골라내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즉흥적인 방식으로 일이 진행된다. "이 일, 누구한테 맡기지?" 머릿속에 몇 개의 이름이 떠오르고, 그 후보군 안에서 한 명이 정해진다.
여기서 이미 승부는 갈린다. 실력이 있어도 그 순간 누군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애초에 기회를 얻을 수조차 없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인식된 역량'이라 부른다. 실제 실력과, 다른 사람이 인식하는 실력은 다른 층위의 문제라는 뜻이다.
기회를 자주 얻는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조직 안에서 이미지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숫자 다루는 건 저 사람", "까다로운 고객은 저 사람에게"처럼 특정 문제와 이름이 짝지어져 있다. 반대로 이것저것 두루 평균 이상으로 해내지만 뚜렷한 인상이 없는 사람은, 정작 중요한 순간 후보군에 오르지 못한다.
벨 연구소가 찾아낸 차이
1990년대 미국 벨 연구소에서 있었던 한 연구가 이 지점을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경영학자 로버트 켈리와 심리학자 재닛 캐플런은 벨 연구소 엔지니어 중 동료와 상사가 공통으로 인정하는 상위 성과자 그룹과 평범한 성과자 그룹을 나눈 뒤, 지능검사와 성격검사로 둘의 차이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몇 년에 걸친 조사에서도 유의미한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실력 차이가 아니라면 무엇이 달랐을까. 두 연구자가 찾아낸 답은 일하는 방식이었다. 상위 성과자들은 문제가 생기기 전부터 도움을 주고받을 관계를 미리 만들어 두었고, 자신의 성과를 남들이 알아볼 수 있게 전달하는 데 능숙했다. 그래서 정작 기회가 필요한 순간, 이미 그를 떠올릴 사람이 마련돼 있었던 것이다.
기회에는 복리가 붙는다는 사실도 여기서 드러난다. 누구도 처음부터 대형 프로젝트를 맡지 않는다. 작은 발표 하나, 회의 배석 한 번, 사소한 협업 요청 하나가 시작이다. 그 작은 기회에서 좋은 결과를 내면 "저 사람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가 다음 기회의 문턱을 낮춘다. 반대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은 실력을 증명할 경험 자체가 쌓이지 않는다. 두 사람의 격차가 10년 뒤 갑자기 벌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작은 차이가 매년 복리로 쌓인 결과에 가깝다.
성과는 전달되어야 존재한다
묵묵히 일을 잘 해내면 언젠가 알아봐 줄 거라는 믿음은 대체로 틀린다. 상사는 모든 직원이 실제로 어떻게 일했는지 지켜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기회를 자주 얻는 사람은 "프로젝트를 마쳤습니다"라고 보고하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해서 처리 시간을 30% 줄였습니다"처럼, 상대가 따로 해석할 필요 없이 곧바로 가치를 알아볼 수 있게 전달한다. 이것은 자기 자랑과는 다른 기술이다. 성과를 만드는 능력과 성과를 전달하는 능력은 서로 다른 역량이라는 뜻이다.
사고 안 칠 사람이라는 신뢰
직급이 올라갈수록 중요해지는 또 하나의 신호는 예측 가능성이다. 관리자가 중요한 일을 맡길 때 찾는 사람은 반드시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사고가 나지 않을 사람이다. 마감을 지키고, 문제가 생기면 먼저 알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정확히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 이런 평판은 실력의 증거는 아니지만,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배분받는 데는 실력만큼 강하게 작동한다.
관계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맥이라고 하면 흔히 술자리나 사내 정치를 떠올리지만, 실제로 기회를 만드는 관계는 다르다. 핵심은 나를 아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내 실력을 신뢰하는 사람이 조직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가다. 실비아 앤 휴렛이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후배를 지지해 주는 선배(스폰서)가 있는 직원은 그렇지 않은 직원보다 비중 있는 프로젝트를 스스로 요청하는 빈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좋은 기회는 공고가 뜨기 전에 사람을 먼저 찾는 경우가 많다. 그때 후보로 거론되려면, 이미 누군가 나를 대신 추천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결국은 실력이다
그렇다고 실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실력이 없으면 어렵게 얻은 기회를 다음 기회로 연결하지 못한다. 눈에 띄기만 하고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사람의 평판은 오래가지 않는다. 반대로 실력이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 애초에 후보군에 들지 못한다. 결국 커리어는 실력에서 시작해 가시성을 거쳐 신뢰로, 신뢰에서 기회로, 기회에서 다시 더 큰 실력으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에 가깝다. 이 순환이 몇 년만 반복돼도, 비슷하게 출발한 두 사람의 이력서는 전혀 다른 문장으로 채워진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내가 잘하는 일을, 회사 사람들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다음 기회가 나를 먼저 찾아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있는가.
커리어 점선면: 실력을 키우는 일과 그 실력이 다음 기회를 부르게 만드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