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가격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얼마 전까지 전문성이란 '많이 아는 것'에 가까웠다.
어디서 자료를 찾아야 하는지, 어떤 숫자를 봐야 하는지, 보고서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이런 것들을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값이 나갔다.
AI는 바로 이 지점을 정확히 겨냥한다. 자료를 조사하고, 요약하고, 초안을 만드는 일의 비용을 거의 0에 가깝게 낮춘다.
그 결과 "나는 이걸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더 이상 값이 매겨지지 않는다. 지식 자체의 희소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이미 많은 사람이 체감하고 있는 이야기다. 진짜 질문은 다음이다. 그럼 무엇이 대신 희소해지는가.
답이 넘치자, 진짜 문제가 드러났다
AI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면 답은 하나가 아니라 스무 개가 나온다.
매출이 떨어졌다면 광고비를 늘려야 하나, 가격을 내려야 하나, 유통 채널을 바꿔야 하나—AI는 이 모든 시나리오를 몇 초 안에 그럴듯하게 만들어낸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회사는 결국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스무 개의 답 중 열아홉 개를 왜 버려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AI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이다.
"이 숫자는 우리 조직 구조상 믿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이 문제보다 저 문제를 먼저 풀어야 합니다." "이건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우리 고객에게는 안 통합니다."
이런 판단에는 맥락이 필요하고, 맥락은 경험에서 나온다. 그래서 전문성의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무엇을 아느냐에서, 무엇을 걸러낼 수 있느냐로.
경력 10년은 사실 '패턴 저장소'다
경력이 값이 나가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 일해서가 아니다.
1973년 심리학자 윌리엄 체이스와 허버트 사이먼은 체스 마스터와 초보자에게 실제 대국에서 나온 체스판을 몇 초간 보여준 뒤 그대로 재현해보라고 했다. 마스터는 말의 위치를 거의 완벽하게 기억했지만 초보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데 말을 무작위로 흩어놓은 체스판을 보여주자 상황이 달라졌다. 마스터와 초보자의 기억력 차이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마스터가 잘 기억한 건 타고난 기억력이 아니라, 수만 번의 대국에서 축적된 '패턴'이었다. 실제로 있을 법한 배치는 하나의 의미 있는 덩어리로 저장되지만, 무작위 배치는 그 덩어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후 연구자들은 체스 마스터가 이런 패턴을 수만 개 단위로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일도 비슷하다. 10년 차가 신입보다 나은 건 정보를 더 많이 알아서가 아니다. "이거 예전에 봤던 상황과 비슷한데"라는 감각—패턴을 알아보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다. 이 감각은 데이터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조직의 사정, 고객의 습성, 업계의 관행까지 함께 저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AI가 흉내 내기 까다롭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건 '책임'이다
AI는 선택지를 만들 수는 있어도, 그 선택의 결과를 짊어지지는 않는다.
중요한 채용을 결정하고, 새로운 사업 진출 여부를 판단하고, 큰 고객에게 어떤 제안을 할지 최종 사인을 하는 순간—그 결과가 잘못됐을 때 "AI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직은 결국 답을 잘 만드는 사람보다, 판단을 맡길 수 있는 사람에게 더 큰 보상을 줄 가능성이 크다. 신뢰는 AI가 대신 쌓아줄 수 없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전문가의 몸값이 오르는 건 아니다
여기서 한 번은 뒤집어봐야 한다. AI가 지식의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모든 전문가가 그 반사이익을 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위태로운 쪽은 따로 있다. 자료를 찾아 정리하는 일이 업무의 대부분이었던 사람, 정형화된 보고서를 반복적으로 만들어온 사람, 경력 연차 외에는 자신의 전문성을 설명할 말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이 해오던 업무는 AI가 더 빠르고 더 싸게 대체할 수 있다.
문제를 정의하지 못하고, 답을 골라내지 못하고, 결과를 책임질 자리에 서보지 못한 채로 쌓은 연차는—AI 시대에는 오히려 몸값을 지켜주지 못할 수 있다.
즉 AI가 만드는 건 전문가의 소멸이 아니라 전문가 안에서의 격차다. 지식을 가진 사람과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사이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크게 벌어질 수 있다.
그 팀장이 신입과 3년 차의 보고서를 나란히 놓고 오래 들여다봤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결과물을 두고 "이걸 그대로 실행해도 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진짜 궁금했던 것 아닐까.
커리어 점선면
AI가 답의 가격을 낮출수록, 그 답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의 값은 오히려 올라간다. |